• "성폭력 피해자는 노동자가 될 수 없나요?"..김지은씨의 호소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20 조회수 : 148

"성폭력 피해자는 노동자가 될 수 없나요?"..김지은씨의 호소

사진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지난해 11월 29일 서울고법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규탄하고 있는 모습. 2018.11.29 연합뉴스

지난해 3월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세상에 알린 김지은씨. 대법원은 지난 9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하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안 전 지사이지만 김씨를 향한 비난은 계속되고 있고, 김씨는 이 사건으로 안 전 지사 수행 비서직을 잃은 후 지금까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김씨가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다”면서 여성의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20일 발표됐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이날 열린 ‘노동·젠더·세대’라는 이름의 학술회의에서 ‘여성 노동 문제로 본 미투 운동:피해자는 노동자가 될 수 없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발표됐다. 김씨와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이하 두 사람)와 각각 쓴 글을 합친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다. 글은 이날 권김현영 연구활동가가 발표했다.

두 사람은 글에서 “도덕 혹은 사생활 문제라는 등 이 사건을 여전히 불륜 혹은 변심에 의한 복수 등의 문제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 “이런 시각은 가족이나 친밀한 사이에는 성폭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통념에 기반해있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이 범죄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부인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또 이 사건이 직장에서 업무 중 벌어진 문제였다는 점을 지운다”고 밝혔다.

안희정 사건은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업무상 위력에 위한 간음·추행과 강제추행이다. 즉 권력형 성폭력이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건을 노동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김씨에게 ‘왜 바로 그만두지 않았는지’를 반복적으로 묻는다고 두 사람은 지적했다.

두 사람은 “복직 투쟁을 하는 해고자에게 ‘그렇게 당신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던 직장에 뭐하러 다시 돌아가려고 하냐’고는 묻지 않는 사람이 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직장을 즉시 그만두지 않거나 다시 돌아가려고 하면 즉각적인 의심을 떠올리는 걸까”라고 반문했다.

안 전 지사는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김씨에게 성적으로 접근했고 김씨를 수차례 성폭행했다. 지난해 2월 ‘미투’ 운동이 확산할 때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김씨에게 사과한 후에도 같은 범행을 계속했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 29일~지난해 2월 25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다. 공소가 제기된 범죄사실 10건 중 9건이 유죄로 최종 확정됐다.

두 사람은 “수행 비서는 상사가 업무나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사소한 불편도 없도록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하고, 직위 특성상 상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해야 하며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명하복 관계에 놓여 있다”면서 “특히 상사가 정치인, 저명인사 등 사회적 유명인인 경우에는 수행 비서의 업무 강도나 상사에 대한 종속성은 통상 더 높아지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안 전 지사의 일정을 챙기고 물품과 음식을 준비했다. 안 전 지사의 개인 용무를 대행했고, 착신을 전환해 안 전 지사에게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 등의 응대 업무도 했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고 장시간에 걸쳐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렸다. 또 안 전 지사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감정노동도 수행해야 했다. 이런 엄연한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을 수행한 것이라는 인식에 포획된다는 것이 두 사람의 설명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월 1일 서울고법에서 열리는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9.2.1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피해자 의심하는 문화 여전

두 사람은 “‘왜 그만두지 않았는지’라는 식의 질문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다”면서 “공무원이면서 (신분 보장이 되지 않는) 특수고용직이며 1인 대상 집중 업무를 하는 피해자(김씨) 입장에서는 임면권자(안 전 지사)에게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가 곧 그만두는 일”이라고 밝혔다. 김씨 역시 생계 등을 이유로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두 사람은 또 “(업무상 우월한 지위에 기반한) 권력 남용이 곧 폭력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유독 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둘 사이의 합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남성 중심의 성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그리고 ‘갑질’이라는 이름의 위계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여직원에 대한 (남성 상급자의) 성적 접근은 동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고 비판했다.

김씨는 지난해 9월 민주노총이 발행한 ‘노동과세계’에 기고한 글을 통해 “재판 중에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가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좋은 근거로 사용됐다. 그렇게 수년간의 제 노력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인생으로 평가받았다”면서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날 발표된 글 마지막에서 두 사람은 “이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다음에, 심지어 법정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은 무엇일까. 피해로부터의 회복은 노동자로서의 권리 회복이기도 하다”면서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는 무사히 다시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 의식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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